“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장 20절)
30년 새벽,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30년째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습관처럼 시작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습니다.
사업이 가장 바쁠 때도, 몸이 힘들 때도, 새벽에 일어나 예배당에 앉는 그 시간이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자리가 됐습니다.
새벽 4시, 5시에 혼자 앉아 있으면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날 해결해야 할 일들,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손에서 풀려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처음 몇 년은 솔직히 억지로 일어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알람이 울리면 조금만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고, 몸이 무거운 날은 정말 가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마음을 이기고 자리에 앉으면, 어김없이 무언가가 달라졌습니다.
새벽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 앞에 있으면, 그날 하루가 다르게 펼쳐졌습니다.
결정해야 할 일에 방향이 보이기도 했고,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던 문제가 작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경험이 쌓이면서, 새벽예배가 억지로 가는 자리에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사업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도 새벽예배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국세가 밀리고, 직원들이 떠나고,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기에도 새벽마다 예배당에 앉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그날의 묵상 글을 쓰는 그 반복이 주님과 함께하는 식탁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휴대폰 메모장 안에 그 묵상 글들이 2500개쯤 쌓여 있습니다.
누군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새벽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 응답하는 것이 그 방식이었습니다.
먼저 오시는 주님 —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의 교회였습니다.
부유하고 불편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 교회를 향해 여전히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억지로 밀고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먼저 문을 열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도 말씀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주님과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거함이 교회 출석이나 봉사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주님은 오늘도 내가 먼저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3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새벽의 의미
교회에 다니는 신자는 많지만 주님을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신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봉사에 힘쓰는 것과,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30년의 새벽예배가 가르쳐준 것은 바로 그 차이였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관계, 의식이 아니라 임재, 그 차이를 새벽마다 조금씩 배워왔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두드림에 응답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 새벽에 조용히 앉아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30년이 지났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매일 새롭습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주님은 문밖에서 두드리시고, 나는 새벽마다 그 문을 열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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