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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없이는 경건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성숙할 수도 없습니다.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열매 맺을 수도 없습니다.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려 하거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부패했을 때 노아는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이 노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가 노아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내가 한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의 반대가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내 의지로 버텨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은혜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교만이 은혜를 막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은혜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겸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말씀을 달게 받고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정직함이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죄가 발견되면 즉시 고백하고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셋째는 말씀을 전 삶의 영역에 세밀하게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넷째는 징계를 달게 받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는 자신에게 있는 가시가 은혜임을 알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자랑했습니다. 그 가시가 은혜의 통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섯째는 기쁨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주님만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 은혜를 받는 자리였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은혜로 시작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이 고백을 오늘도 드립니다.

    모든 자랑을 내려놓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부인합니다.

    주님만 높입니다.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그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자임을 인정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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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모든 것이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모든 것이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모든 것이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생각합니다.

    오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힘으로도 아니고 내 의지로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성령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음으로 실패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일을 하려고만 했습니다.

    성령님보다 앞서 행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이 근심하신다는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 살 때 근심하셨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반응을 할 때 슬퍼하셨습니다.

    성령님이 느끼시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실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죄까지도 깨닫게 하셔서 회개하도록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우리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고 고치게 하시고 능하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시고 구원하시고 살리시고 정직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오래참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온유하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자기를 부인하게 하시고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고 헌신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셨습니다.

    이 목록이 얼마나 긴지 모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들이 다 여기 있었습니다.

    성령 없이는 이 중 하나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모든 것이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먼저 성령님께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오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단을 해야 할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성령에 이끌리셨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을 의지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 성령님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내 힘으로 살지 않겠다는 결단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살겠다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오늘도 그 성령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나는 성령님보다 앞서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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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순종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줄 아는데 불순종 가운데 사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에는 여러 얼굴이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말씀에 순종하는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자기만족이나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가 아닌 자기의 유익이나 세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단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고 마지못해서 하는 순종이나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불순종에 해당됐습니다.

    그렇다면 참 순종은 무엇일까요.

    마음으로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믿음이 순종이라면 순종은 행동 이전에 믿음이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를 생각합니다.

    그 말씀이 이해됐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단 마음으로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이 참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순종을 보시고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형식보다 마음이 먼저라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의 모델은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순종을 넘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은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셔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알 때 순종이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믿을 때 그 말씀에 전 존재를 맡길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순종의 기초였습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참 순종의 모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전 존재와 전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언제든지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 순종의 훈련이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매일의 훈련이 쌓이면서 순종이 삶이 됐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와 함께 존재하고 그를 통해서 일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순종이 이토록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곧 순종이었습니다.

    오늘 그 순종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순종이 하나가 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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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순수함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순수함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하나님은 존재가 순수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순수함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이 문장이 낯섭니다.

    세상은 성공을 다르게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가지는 것 더 높이 올라가는 것 더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순전함을 사단 앞에서 자랑하셨습니다.

    욥의 재산을 자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명성을 자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함이었습니다.

    순수함이란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사람은 진리에 민감한 반응을 했습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오랫동안 기억이 나고 존재와 삶에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함이 사라지면 달라졌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를 받는 것 같지만 단 몇 시간도 영향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순수함이 사라지는 것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이었습니다.

    이번 한 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타협이 쌓이면서 마음이 무디어졌습니다.

    사울이 그 예였습니다.

    사울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의 마음은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불순종이 쌓이면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순수함이 사라졌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을 때 내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회개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되어 또다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다윗을 찾아 죽이려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는 금방 깨닫는 것 같은데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바로 순수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달랐습니다.

    사울의 옷자락을 베고 나서 마음이 찔렸습니다.

    즉각 반응했습니다.

    그 반응이 순수함의 표시였습니다.

    진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이 순수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순수함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순수함의 차이는 단순함의 차이였습니다.

    진리를 듣고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느냐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리를 듣고 얼마나 오랫동안 반응하느냐였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자들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단순함이었습니다.

    꾸밈이 없었습니다.

    들은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순수함을 회복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린아이처럼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그냥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익을 따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체면을 계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단순함이 순수함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불순물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 살펴봅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물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순수함이 행복이고 성공이었습니다.

    오늘도 그 순수함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들은 말씀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고 있습니까. 사울처럼 순간 은혜를 받고 금방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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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모든 넘어짐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모든 넘어짐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모든 넘어짐의 뿌리는 교만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약점이 아닌 교만이 실패의 진짜 뿌리이며 우리의 약점은 교만을 막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주님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한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비참한 실패를 하였는데 이유가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밀 까불 듯 베드로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모든 넘어짐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로 인하여 자신의 약점으로 넘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도 실패의 뿌리인 교만은 보지 못하고 약한 부분만을 고치려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약한 부분은 우리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은혜입니다.

    즉 넘어짐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마귀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마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왜 그렇게 무서울까요.

    교만은 하나님을 보이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만해질 때 하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하나님을 밀어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려도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교만이었습니다.

    그 교만이 그를 넘어지게 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연약함으로 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질이 겸손이신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까지도 겸손의 도구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려 완전히 제거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 가장 큰 문제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뽑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점은 은혜로만 덮어지는 것이며 또한 은혜를 얻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환경과 마음에 있는 가라지를 뽑으려 하지 말고 함께 자라도록 가만히 두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인 사단의 사자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으나 주님의 응답은 바울의 유익을 위하여 가시를 남겨두었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늘의 큰 계시를 많이 받고 주님께 크게 사용되었던 그 원인이 바로 주님의 은혜와 함께 육체의 가시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안 그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점이 은혜가 됩니다.

    약점이 있을 때 겸손해집니다.

    그 의지가 은혜를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교만하면 약점이 넘어짐의 도구가 됩니다.

    겸손하면 약점이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모든 넘어짐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후에 주님이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물음이 베드로를 회복시켰습니다.

    교만이 꺾인 자리에서 진정한 겸손이 시작됐습니다.

    그 겸손이 베드로를 초대교회의 기둥으로 만들었습니다.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겸손의 훈련이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백이 쌓이면서 겸손이 자라났습니다.

    모든 넘어짐의 뿌리는 교만이었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어떤 교만이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도 내 마음에 있는 교만을 보게 하소서. 약점 앞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을 주소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오늘도 붙들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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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라는 이 고백을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깨달아 알고 의지하는 것이 입체적 믿음임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주님의 완전한 사랑 무한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입체적 사랑이 아닌 입체적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주님을 입체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깨달아 알고 또한 믿고 의지하면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우리도 그 사랑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 입체적 사랑을 바울은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랑이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하기를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는 말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넓이는 어떤 사람도 다 품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어떤 우리의 약점이나 실수도 다 품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실수해도 다 품어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넓이 안에 우리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길이는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부족해도 실패해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길이가 우리를 붙들었습니다.

    사랑의 높이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내어 줌으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올리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높이만큼 우리를 올려주셨습니다.

    사랑의 깊이는 은밀하고 섬세한 사랑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또한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도 묵묵히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 깊이가 우리를 안심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알 때 그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사랑의 넓이가 우리의 모든 약점과 실수를 품어주신다는 것을 알 때 두렵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길이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때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높이가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셨다는 것을 알 때 감사하게 됩니다.

    사랑의 깊이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때 안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알 때 우리도 그 사랑을 반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웃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이처럼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주님을 전 존재로 전 삶에서 세밀하게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주님도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전 존재와 전 삶에 세밀하게 반응하십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입체적 믿음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 주님의 사랑의 넓이를 생각하며 품는 것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주님의 사랑의 길이를 기억하며 끝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의 넓이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길이가 오늘도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높이가 나를 올려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가 나를 안심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오늘도 그 사랑으로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나는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랑을 알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낮아짐의 깊이가 성숙의 깊이와 비례하며 점점 작아질수록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비천하게 낮아지심으로 성부를 높이시고 우리를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그리고 종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여 음부에까지 내려가심으로 하나님이 주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숙과 성장은 낮아짐의 깊이와 비례하며 우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을 닮게 되고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아래로 자란다는 말은 우리가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존재가 너무도 교만하고 무능하며 어리석고 약하며 또한 악하고 거짓되며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주님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주님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괜찮은 존재라고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 존경을 받으려는 망상을 버리고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는 약점까지 인정하고 하나님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점점 더 작아짐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이 작아지므로 주님만을 전 존재와 전 삶으로 의지하며 높이는 것이 아래로 자람이요 성숙이고 성장입니다.

    아래로 자란다는 것이 자존감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앎이 오히려 자유하게 했습니다.

    내가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내가 강한 척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주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의지가 진정한 힘이었습니다.

    낮아진다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간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아래로 자라는 사람은 달랐습니다.

    타인에게 존경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존경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낮아질수록 하나님이 높이시는 역설이 거기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가 됐습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혔습니다.

    그 아래로 내려가는 자리에서 요셉이 자랐습니다.

    낮아질수록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도망다니며 낮아졌습니다.

    그 낮아짐 속에서 시편이 나왔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작아질수록 하나님이 크게 보였습니다.

    아래로 자란 자가 가장 크게 쓰임받은 것이었습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이 가장 깊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음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 낮아지심이 가장 깊었기에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성장이었습니다.

    아래로 자라는 것이 성장이었습니다.

    오늘 내 마음을 살펴봅니다.

    더 높아지려 하고 있습니까.

    더 인정받으려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을 때 아래로 자람이 시작됩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낮아질수록 주님을 닮게 됩니다.

    오늘도 아래로 자라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낮아질수록 주님을 닮게 됩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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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말이 존재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말이 존재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말이 존재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우리의 말이 곧 우리의 존재요 행동이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말이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이 말씀이기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주님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심판 날에 저를 부끄러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도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과 말씀이 동일한 본질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이 우리의 존재요 행동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쌓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무엇이 쌓여 있는가가 말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존재가 아름다운 사람은 믿음의 말 창조적인 말을 하여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마음이 악한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하므로 파괴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말이 존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사람을 통해 일하실 때 자신의 말을 그 사람에게 주어 그 사람을 통해서 말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 하심으로 말씀으로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하고 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일하십니다.

    그가 일하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말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됐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의 말도 그 능력이 있었습니다.

    잠언 18장 21절도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혀에 죽고 사는 것이 달려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쌓을 때 믿음의 말이 나왔습니다.

    감사를 마음에 쌓을 때 감사의 말이 나왔습니다.

    사랑을 마음에 쌓을 때 사랑의 말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어떤 말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믿음의 말이 믿음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감사의 말이 감사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말이 사랑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반대로 원망의 말이 원망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말이 존재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말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할 때 주님이 그 말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감사의 말을 할 때 주님이 그 말을 통해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말을 할 때 주님이 그 말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말이 존재이기에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통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감사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들은 말씀을 말하므로 말한 대로 성취하십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이 존재라는 이 진리가 오늘도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도 믿음의 말 감사의 말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고백하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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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라는 이 고백을 안주하거나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임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생명력과 역동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진정으로 심어지기만 하면 반드시 존재의 변화와 함께 성장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안주하거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현상유지가 아니라 퇴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 앞에 와서 땅에 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왔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한 달란트를 그냥 가져 온 것은 현상유지가 아닌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었습니다.

    안주가 왜 위험할까요.

    안주할 때 성장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성장이 멈추면 퇴보가 시작됩니다.

    중립이 없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법칙이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를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많이 남긴 것이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성장했느냐가 기준이었습니다.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처음에 씨앗이었습니다.

    씨앗으로 머물면 현상유지였습니다.

    그런데 땅에 심어지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뻗고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가 됐습니다.

    현상유지가 아닌 성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누룩도 그랬습니다.

    누룩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온 밀가루를 부풀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어질 때 그 누룩처럼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말했습니다.

    안주하는 것을 가장 큰 위험으로 여겼습니다.

    안주는 현상유지가 아니라 곧 타락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패하거나 죄까지도 돌이켰을 때 원래의 자리에 두는 현상유지가 아닌 더 성숙함이나 더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세워 실패가 사역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예가 바로 다윗의 인구조사와 성전건축 터 마련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더욱 겸손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조차 현상유지로 두시지 않고 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셨습니다.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에덴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다 더 완전한 천국을 주십니다.

    실패를 현상유지로 두시지 않고 더 완전한 것으로 회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었습니다.

    성장은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껍질이 깨집니다.

    그 깨짐이 아프지만 그 아픔을 통해 성장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려면 안주함을 깨야 합니다.

    현상유지를 깨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장을 요구하십니다.

    지금 있는 자리보다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오늘도 성장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성장하는 오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내 신앙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익숙한 자리에 안주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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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네가 낫고자 하느냐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네가 낫고자 하느냐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이 고백을 주님은 우리가 원할 때 일하시며 우리의 원함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는 어떤 일도 혼자 하지 않습니다.

    치료도 동행하심도 교제도 사용하심도 변화도 구원도 이김도 우리의 원함 없이 혼자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위급한 일을 만나고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알아서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이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한 주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이 제한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함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자신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심으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보다는 혼자 일하시는 것이 훨씬 더 편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게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가 원함을 통해서 일하심은 주님은 우리를 원하시고 함께 존재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시고 고쳐 주려 가셨음에도 알아서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병도 너무 오래고 연못에 넣어 줄 사람도 없고 물이 동할 때 간신히 일어나 가려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낙망하고 있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그를 주님은 찾아가 그가 원할 때 고쳐 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립니다.

    38년 동안 그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38년 동안 희망이 있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낙망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물음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38년의 낙망 속에서 이미 포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낫고 싶은 마음 자체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 원함을 다시 깨우기 위해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같은 상처를 붙들고 있을 때 자유하고 싶은 원함 자체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같은 죄를 반복할 때 이기고 싶은 원함 자체를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우리의 원함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인격적으로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원함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원함이 우리와 주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물음에 응답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힌 마음의 상처와 죄의 쓴 뿌리 반복되는 실패 사람들과의 갈등을 바라보시며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물음에 오늘 응답하십시오.

    우리의 원함이 주님의 일하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그 물음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 물으셨듯이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십니다.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