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ellice55

  • [조용한 고백] 복을 주시면 하나님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복을 주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복을 주시면 하나님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복을 주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인간은 왜 편안하고 응답은 받고 축복을 받고 부요하고 쓰임을 받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나태하고 교만하고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습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았습니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만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바알을 섬겼습니다.

    복을 받으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구원하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또 기회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지혜를 받았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가장 많이 받은 자가 가장 크게 타락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솔로몬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를 보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아들이 재산을 받아 떠날 것을 알면서도 주셨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돌아왔을 때 달려나가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 아버지와 같으셨습니다.

    버릴 줄 알면서도 주셨습니다.

    그 기다림이 사랑이었습니다.

    복을 주시면 하나님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복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복을 주시면 하나님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또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 근심하시고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스스로 알게 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 때문이 아닌 하나님을 갈망하여 찾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아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실패와 수많은 좌절과 탄식이 있다고 해도 기다리십니다.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에 한 사람 만에 한 사람이 그렇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바라보시고 그렇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오늘 받은 복이 있다면 그 복 때문이 아닌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복을 주시면 버림받으실 것을 알면서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천에 한 사람 그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복을 주시면 버림받으실 것을 알면서도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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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용서의 기도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주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하신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흉악하고 무지한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온갖 긍휼과 자비가 그 기도 안에 녹아있었습니다.

    거역하며 멸망으로 가는 온 인류를 품으시고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애절한 사랑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주님의 기도가 무지한 자들을 향하여 드리는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용서가 왜 어려운지를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가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를 보면 그 논리가 무너집니다.

    주님을 못 박은 자들이 잘못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조건이 없었습니다.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의 무지를 품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 우리도 알지 못하면서 줬습니다.

    우리가 한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용서를 받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나도 알지 못하면서 상처를 준 자라는 것을 알 때 상대방의 알지 못함이 이해가 됩니다.

    그 이해가 용서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의 조건 없는 용서의 기도가 강도를 구원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조건 없는 용서의 기도가 바울을 있게 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외쳤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 용서의 기도가 사울의 마음에 박혔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형들이 그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판 것을 슬퍼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조건 없는 용서였습니다.

    그 용서가 가족을 회복시켰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가 내 안에 남아있었습니다.

    용서할 때 그 상처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용서는 자기를 가장 평안한 가운데로 인도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무한한 용서만이 자기를 무한하게 용서받게 하고 무한한 자유를 얻게 했습니다.

    오늘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내 마음이 무거운 것이 있습니까.

    그 무거움이 사실은 나 자신을 묶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용서의 기도가 그 묶임을 풀어줄 것입니다.

    오늘 용서의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그 기도처럼.

    그 기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습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용서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도 무한한 용서를 받아야 할 자임을 고백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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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더욱 영광스러운 몸이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더욱 영광스러운 몸이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봄이 오면 겨우내 죽은 것 같은 만물이 다시 소생합니다.

    따스한 봄볕이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면 땅속에서 깊은 잠을 자던 각종 애벌레들과 곤충들과 식물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소생함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부활의 진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확실한 부활에 대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핍박자 사울에게까지 보이시므로 부활을 확증하셨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열매의 시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묻힌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생명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싹이 올라옵니다.

    그것이 부활의 그림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가 울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죽음 앞에서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그 말씀이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붙들게 합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더욱 영광스러운 몸이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참 소망이 됨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사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썩을 몸이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됩니다.

    봄에 만물의 소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영광스러운 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소망을 알았습니다.

    부활이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가 바울의 고난을 이기게 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고난이 달리 보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아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도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삶이 오늘의 선택을 달라지게 합니다.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게 합니다.

    주의 일에 힘쓰게 합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닌 더욱 영광스러운 몸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 확신으로 오늘도 살아갑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나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활의 소망으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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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교제하시고 구원하시고 동행하시고 한 몸으로 존재하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와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고 구하지도 않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행하시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즉 우리의 원함이 없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관계하시고 존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기도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은 지 3년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비가 오기를 구했습니다.

    무릎을 땅에 꿇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

    일곱 번을 그렇게 했습니다.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이 구름으로 덮이고 큰 비가 내렸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랬습니다.

    죽게 되었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벽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구했습니다.

    원했습니다.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15년을 더하셨습니다.

    원함과 구함이 하나님을 움직였습니다.

    반면에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벳세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히 낫고 싶을 것 같은데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그 물음 속에 원함의 중요성이 있었습니다.

    38년이 지나면서 낫고자 하는 원함이 희미해졌을 수 있었습니다.

    포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원함을 다시 깨우셨습니다.

    우리도 오래 기다리다 보면 원함이 희미해집니다.

    기도가 줄어듭니다.

    그때 하나님도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원함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구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고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하고 찾는 대가를 지불하기 싫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고 고침을 받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시기를 우리보다도 더 원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구하고 원하고 찾는 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이고 또한 하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금도 누군가 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에 보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 소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고침을 받고 싶습니까.

    변화를 받고 싶습니까.

    그 원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말씀과 기도로 소통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원함에 응답하십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구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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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잘못된 자기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잘못된 자기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자신의 모든 것이 철저히 틀린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모세를 믿고 율법을 지키므로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들의 믿음 행동 말 생각과 판단이 모두 틀렸습니다.

    그런데도 틀린 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잘못된 확신이 결국 예수님을 죽게 했습니다.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하여 잘한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바울도 그랬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옥에 가두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가장 정당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앞장서면서도 잘한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방인이나 무할례자들과는 결코 교제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에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확신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생각합니다.

    오래 믿었을 때 생깁니다.

    많이 알 때도 생깁니다.

    많이 했을 때도 생깁니다.

    오래됨과 앎과 많이 함이 잘못된 확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래서 오래 믿을수록 더 겸손해야 했습니다.

    많이 알수록 더 물어봐야 했습니다.

    잘못된 확신을 깨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이 바울의 모든 확신을 무너뜨렸습니다.

    잘못된 자기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 고백이 무겁습니다.

    나도 주님이 보여주시기까지 나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성경적이고 옳은 것이라고 행동해 왔습니다.

    내 생각이 늘 옳다고 생각하여 이기려고만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닫고 책망만 하는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주님께서 내 눈에 덮였던 것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교만함과 사랑 없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앎이 주님 앞에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 앎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열게 했습니다.

    이제야 주님께서 내 눈에 덮인 것들을 보게 하신다면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오늘도 구합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내 생각과 판단의 틀린 것을 보여주소서. 잘못된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교만함과 사랑 없음을 보게 하시고 주님 앞에 낮아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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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그 어느 것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그 어느 것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그 어느 것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주님께서 옳고 그름의 모든 것과 선과 악의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그 결과를 통해서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판단을 잘못하므로 악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기고 묵묵히 진리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자기의 판단과 선택이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최후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때 신중하고 또 신중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이 아무리 옳아 보여도 하나님 앞에는 틀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은 친구들의 판단이 틀렸다고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변론은 끝없이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라.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고 욥의 정당함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욥이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판단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입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내 억울함을 사람에게 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욥이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판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판단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이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직접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맡김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치어진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가 판단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내가 판단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이 없었습니다.

    내가 물러설 때 하나님이 나서실 수 있었습니다.

    판단을 내려놓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들고 있던 것을 하나님 손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라도 잠잠히 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억울한 상황이 있습니까.

    잠잠히 주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판단이 선하시고 의로우십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내 판단을 주장하고 싶은 상황이 있습니까.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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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말씀과 접붙임의 비밀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말씀과 접붙임의 비밀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알게 하시려고 여러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두 비유가 마음에 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접붙임의 비유였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우리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열매를 맺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비유의 가장 큰 강조점은 씨가 아니라 밭이 어떤 밭인가였습니다.

    각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마음에 받느냐를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접붙임의 비유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존재인 나쁜 나무라 할지라도 그 나무를 자르고 좋은 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면 결국 좋은 나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좋은 나무가 예수님이며 말씀이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기만 하면 좋은 나무가 되어 구원을 얻게 되고 아름다운 존재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우리의 마음 밭이 얼마나 좋으냐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접붙임의 비유는 달랐습니다.

    나쁜 나무라도 좋은 나무에 접붙이기만 하면 됐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는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접붙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합니다.

    나무를 접붙일 때 가장 먼저 기존 가지를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찍어냄이 아프지만 그것 없이는 접붙임이 불가능했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이 그 찍어냄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좋은 나무의 접순을 붙였습니다.

    말씀을 존재 깊은 곳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 접순이었습니다.

    그 접순이 뿌리를 내리면서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좋은 나무의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나무에 붙어있을 때 열매가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말씀과 접붙임의 비밀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날마다 죽고 자신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요 살기가 등등한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았던 이유였습니다.

    접붙임의 비밀이었습니다.

    내가 사나 주님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통해서 사시므로 주님의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말씀과 접붙임이었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깊이 예수님께 접붙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그 접붙임이 더 깊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자아를 찍어내고 말씀을 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말씀과 접붙임의 비밀. 내가 날마다 죽고 예수님께 접붙일 때 주님의 아름다운 인격과 삶이 나를 통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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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즐거이 하나님을 의뢰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즐거이 하나님을 의뢰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수없이 반복적으로 넘어지고 실패하고 그래서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하나님을 의뢰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왜 기다리시는지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약함이나 습관적인 죄성을 결코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반복적으로 넘어지므로 슬퍼하고 아파하며 낙심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존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렵고 징계가 무서워서가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좋아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죄를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반복적으로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셨다고 느꼈습니다.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아파하시면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이 베드로에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기회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의 이야기가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갈 때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허용하셨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찾아가지 않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그 기다림의 고통은 아버지의 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돌아온 그 아들은 분명 잃었다 그리고 죽었다 다시 얻은 새로운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참 사랑의 관계가 실패와 아픔을 통해서 얻어졌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즐거이 하나님을 의뢰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때문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해서 오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뻐서 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 자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알아서 할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해서 방관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함께 아파하시고 마음을 졸이시지만 참고 기다리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수없는 실패 속에 실망을 당해 아파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기다림이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두려움이 아닌 진심으로 하나님이 좋아 의뢰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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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평탄한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평탄한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신실하고 성숙한 신앙은 아무 일이 없는 평탄한 일상생활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고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탄한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거나 피상적이고 미지근한 신앙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렵고 위험한 때는 평탄한 일상생활을 사는 때였습니다.

    평탄한 일상이 왜 가장 위험한 때인지를 생각합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평탄할 때는 그 이유가 흐릿해졌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솔로몬이 그 예였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나라가 평화로웠습니다.

    부귀영화가 넘쳤습니다.

    평탄한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탄함 속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졌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달랐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매일 일어나 자식을 돌봤습니다.

    밥을 먹었습니다.

    잠을 잤습니다.

    그 평범한 일상을 300년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중에도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노아도 그랬습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묵묵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 일상의 동행이 자신과 가족은 물론 모든 동물들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랬습니다.

    천막 만드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바울을 도왔습니다.

    아볼로를 가르쳤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됐습니다.

    평탄한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어렵고 힘들고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일이 없고 모든 것이 풍요할 때 하나님이 너무 좋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고 하나님과 동행이었습니다.

    날마다 세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습니다.

    삶이 기도가 되고 예배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거나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마음을 그분 앞에 토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셨을 때 에녹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이 땅의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일상으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평탄한 일상에서의 동행이 영원한 동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이 평탄한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하나님을 찾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동행이 쌓여 에녹처럼 노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평탄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아무 일이 없을 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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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고백]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존재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존재하시며 친밀한 관계로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성령으로 우리 존재 안에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므로 성령을 소멸하고 근심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성령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부재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나간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가인의 삶은 도망자의 삶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았을 때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자리를 악령이 채운 것이었습니다.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빠지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우상 숭배와 왕국의 분열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고통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고 죽은 지 이미 오랜 자와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부재가 죽음과 같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부르심을 받은 후에 주님의 부재 속에 13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에게도 가정에도 큰 고통과 갈등과 번민이 있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서 약속을 견고케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주님 없이 항해를 하다가 큰 물결로 인하여 고통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배에 오르자 곧 잔잔하여 평안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재의 고통을 맛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부재의 고통이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게 만들었습니다.

    그 찾음이 더 깊은 임재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

    따라서 하나님의 부재도 하나님의 임재도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숨기심과 나타내심을 통해서 우리를 만드시고 함께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재는 언제 찾아왔습니까.

    분주함이나 편리함 부요함 세상의 즐거움 속에 빠져 주님에 대해 무관심할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3년의 부재의 시간을 통과한 후 하나님과 더 깊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부재의 고통이 더 깊은 임재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나는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재를 느끼고 있습니까.

    부재를 느낀다면 그 고통 속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기를 소망합니다.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얼굴을 비추십니다.

    그 얼굴이 비추일 때 평안이 임합니다.

    오늘 그 임재를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하나님의 부재의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게 합니다.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얼굴을 비추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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