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조용한 고백]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약하고 부족한 자리에서 만나는 은혜,
그 솔직한 고백들을 담았습니다.

  • [조용한 고백]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라는 이 고백을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깨달아 알고 의지하는 것이 입체적 믿음임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주님의 완전한 사랑 무한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입체적 사랑이 아닌 입체적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주님을 입체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깨달아 알고 또한 믿고 의지하면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우리도 그 사랑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 입체적 사랑을 바울은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랑이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하기를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는 말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넓이는 어떤 사람도 다 품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어떤 우리의 약점이나 실수도 다 품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실수해도 다 품어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넓이 안에 우리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길이는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부족해도 실패해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길이가 우리를 붙들었습니다.

    사랑의 높이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내어 줌으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올리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높이만큼 우리를 올려주셨습니다.

    사랑의 깊이는 은밀하고 섬세한 사랑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또한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도 묵묵히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 깊이가 우리를 안심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알 때 그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사랑의 넓이가 우리의 모든 약점과 실수를 품어주신다는 것을 알 때 두렵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길이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때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높이가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셨다는 것을 알 때 감사하게 됩니다.

    사랑의 깊이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때 안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알 때 우리도 그 사랑을 반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웃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이처럼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주님을 전 존재로 전 삶에서 세밀하게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주님도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전 존재와 전 삶에 세밀하게 반응하십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입체적 믿음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 주님의 사랑의 넓이를 생각하며 품는 것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주님의 사랑의 길이를 기억하며 끝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입체적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의 넓이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길이가 오늘도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높이가 나를 올려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가 나를 안심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입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오늘도 그 사랑으로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나는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랑을 알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낮아짐의 깊이가 성숙의 깊이와 비례하며 점점 작아질수록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비천하게 낮아지심으로 성부를 높이시고 우리를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그리고 종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여 음부에까지 내려가심으로 하나님이 주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숙과 성장은 낮아짐의 깊이와 비례하며 우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을 닮게 되고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아래로 자란다는 말은 우리가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존재가 너무도 교만하고 무능하며 어리석고 약하며 또한 악하고 거짓되며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주님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주님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괜찮은 존재라고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 존경을 받으려는 망상을 버리고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는 약점까지 인정하고 하나님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점점 더 작아짐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이 작아지므로 주님만을 전 존재와 전 삶으로 의지하며 높이는 것이 아래로 자람이요 성숙이고 성장입니다.

    아래로 자란다는 것이 자존감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앎이 오히려 자유하게 했습니다.

    내가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내가 강한 척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주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의지가 진정한 힘이었습니다.

    낮아진다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간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아래로 자라는 사람은 달랐습니다.

    타인에게 존경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존경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낮아질수록 하나님이 높이시는 역설이 거기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가 됐습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혔습니다.

    그 아래로 내려가는 자리에서 요셉이 자랐습니다.

    낮아질수록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도망다니며 낮아졌습니다.

    그 낮아짐 속에서 시편이 나왔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작아질수록 하나님이 크게 보였습니다.

    아래로 자란 자가 가장 크게 쓰임받은 것이었습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이 가장 깊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음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 낮아지심이 가장 깊었기에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성장이었습니다.

    아래로 자라는 것이 성장이었습니다.

    오늘 내 마음을 살펴봅니다.

    더 높아지려 하고 있습니까.

    더 인정받으려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을 때 아래로 자람이 시작됩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낮아질수록 주님을 닮게 됩니다.

    오늘도 아래로 자라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낮아질수록 주님을 닮게 됩니다. 성장은 아래로 자람입니다.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말이 존재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말이 존재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말이 존재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우리의 말이 곧 우리의 존재요 행동이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말이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이 말씀이기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주님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심판 날에 저를 부끄러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도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과 말씀이 동일한 본질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이 우리의 존재요 행동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쌓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무엇이 쌓여 있는가가 말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존재가 아름다운 사람은 믿음의 말 창조적인 말을 하여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마음이 악한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하므로 파괴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말이 존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사람을 통해 일하실 때 자신의 말을 그 사람에게 주어 그 사람을 통해서 말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 하심으로 말씀으로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하고 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일하십니다.

    그가 일하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말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됐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의 말도 그 능력이 있었습니다.

    잠언 18장 21절도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혀에 죽고 사는 것이 달려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쌓을 때 믿음의 말이 나왔습니다.

    감사를 마음에 쌓을 때 감사의 말이 나왔습니다.

    사랑을 마음에 쌓을 때 사랑의 말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어떤 말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믿음의 말이 믿음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감사의 말이 감사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말이 사랑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반대로 원망의 말이 원망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말이 존재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말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할 때 주님이 그 말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감사의 말을 할 때 주님이 그 말을 통해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말을 할 때 주님이 그 말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말이 존재이기에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통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감사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들은 말씀을 말하므로 말한 대로 성취하십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이 존재라는 이 진리가 오늘도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도 믿음의 말 감사의 말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고백하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아멘.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라는 이 고백을 안주하거나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임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생명력과 역동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진정으로 심어지기만 하면 반드시 존재의 변화와 함께 성장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안주하거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현상유지가 아니라 퇴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 앞에 와서 땅에 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왔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한 달란트를 그냥 가져 온 것은 현상유지가 아닌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었습니다.

    안주가 왜 위험할까요.

    안주할 때 성장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성장이 멈추면 퇴보가 시작됩니다.

    중립이 없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법칙이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를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많이 남긴 것이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성장했느냐가 기준이었습니다.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처음에 씨앗이었습니다.

    씨앗으로 머물면 현상유지였습니다.

    그런데 땅에 심어지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뻗고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가 됐습니다.

    현상유지가 아닌 성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누룩도 그랬습니다.

    누룩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온 밀가루를 부풀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어질 때 그 누룩처럼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말했습니다.

    안주하는 것을 가장 큰 위험으로 여겼습니다.

    안주는 현상유지가 아니라 곧 타락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패하거나 죄까지도 돌이켰을 때 원래의 자리에 두는 현상유지가 아닌 더 성숙함이나 더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세워 실패가 사역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예가 바로 다윗의 인구조사와 성전건축 터 마련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더욱 겸손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조차 현상유지로 두시지 않고 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셨습니다.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에덴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다 더 완전한 천국을 주십니다.

    실패를 현상유지로 두시지 않고 더 완전한 것으로 회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었습니다.

    성장은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껍질이 깨집니다.

    그 깨짐이 아프지만 그 아픔을 통해 성장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려면 안주함을 깨야 합니다.

    현상유지를 깨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장을 요구하십니다.

    지금 있는 자리보다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현상유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오늘도 성장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성장하는 오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내 신앙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익숙한 자리에 안주하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네가 낫고자 하느냐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네가 낫고자 하느냐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이 고백을 주님은 우리가 원할 때 일하시며 우리의 원함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는 어떤 일도 혼자 하지 않습니다.

    치료도 동행하심도 교제도 사용하심도 변화도 구원도 이김도 우리의 원함 없이 혼자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위급한 일을 만나고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알아서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이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한 주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이 제한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함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자신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심으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보다는 혼자 일하시는 것이 훨씬 더 편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게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가 원함을 통해서 일하심은 주님은 우리를 원하시고 함께 존재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시고 고쳐 주려 가셨음에도 알아서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병도 너무 오래고 연못에 넣어 줄 사람도 없고 물이 동할 때 간신히 일어나 가려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낙망하고 있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그를 주님은 찾아가 그가 원할 때 고쳐 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립니다.

    38년 동안 그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38년 동안 희망이 있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낙망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물음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38년의 낙망 속에서 이미 포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낫고 싶은 마음 자체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 원함을 다시 깨우기 위해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같은 상처를 붙들고 있을 때 자유하고 싶은 원함 자체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같은 죄를 반복할 때 이기고 싶은 원함 자체를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우리의 원함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인격적으로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원함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원함이 우리와 주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물음에 응답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힌 마음의 상처와 죄의 쓴 뿌리 반복되는 실패 사람들과의 갈등을 바라보시며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물음에 오늘 응답하십시오.

    우리의 원함이 주님의 일하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그 물음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 물으셨듯이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십니다.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리라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리라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하나님께서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작은 자 그 약한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너무도 작고 약하기 때문에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고 약함이 은혜였습니다.

    우리의 자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강함이었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작음과 약함과 무능함을 알고 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가장 큰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무능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이 작고 약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나는 므낫세 지파 중에 가장 약하고 내 집에서도 가장 작은 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라고 했습니다.

    그 작음과 약함의 고백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할 때 오히려 실패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가 베드로를 진정으로 약한 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약한 자 베드로를 통해 오순절에 삼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강함이 약함이 되고 자신의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할 때 온전하게 나타났습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리라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신의 무능함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것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장 큰 선이었습니다.

    작고 약하기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찾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 찾음 위에 하나님이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셨습니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 찾음이었습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도 살아있습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저는 작고 약하고 무능합니다. 그렇기에 능하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작은 자를 통해 천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아멘.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라는 이 고백을 신앙의 가장 큰 위기인 무사안일함을 베어내는 마음의 할례가 매 순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위기요 적은 무사안일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고통의 때나 위험한 때가 아닌 무사안일한 때에 다 넘어지고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사안일함 속에서는 우리 육체의 본성이 가장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과 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익숙하도록 무사안일을 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려면 버려야 하는 아픔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살을 잘라내는 아픔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무사안일함이 어떻게 우리에게 들어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안일함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 쉬어도 되겠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작은 안일함이 쌓이면서 무사안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무사안일이 익숙해지면서 육체의 본성이 자라납니다.

    그렇게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전쟁에 나가야 할 때 궁에 머물렀습니다.

    그 무사안일함 속에서 밧세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이 좋았던 다윗이 무사안일한 때에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무사안일함 속에서 우상을 섬기게 됐습니다.

    무사안일함이 신앙의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무사안일함을 베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마음에 하는 것으로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이었습니다.

    즉 무사안일함을 베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달랐습니다.

    무사안일함을 베어낸 자리에 열심이 채워졌습니다.

    안주함을 베어낸 자리에 도전이 채워졌습니다.

    익숙함을 베어낸 자리에 새로운 은혜가 채워졌습니다.

    오늘 내 마음을 점검합니다.

    어떤 익숙함에 안주하고 있습니까.

    어떤 무사안일함이 내 마음에 자라고 있습니까.

    그것을 발견했다면 지금 베어내야 합니다.

    오래 익숙해질수록 베어내는 아픔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구약의 할례는 일생에 한번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가죽을 베는 할례는 매 순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 우리 마음의 가죽을 벨 수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사안일함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편안함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억이 마음의 할례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아픔을 통과할 때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의 은혜가 임합니다.

    마음의 할례가 오늘도 필요합니다.

    오늘도 그 할례를 구합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도 내 마음의 무사안일함을 베어내는 할례를 허락하소서. 나는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누림이 은혜요 복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누림이 은혜요 복입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누림이 은혜요 복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누림은 환경적인 조건이 아니라 버림과 비움과 감사에서 오는 은혜임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누리고 진리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누림은 환경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버림과 비움에서 오는 은혜입니다.

    누림은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에서 옵니다.

    누림은 관계의 친밀함이나 소중함을 인식하는 데서 옵니다.

    누림은 무엇보다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말씀을 통해 오는 진정한 행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질이 많고 세상적인 명예나 권세가 있다고 해도 누림이 없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자입니다.

    그에게 누림이 없었다는 것은 정직함이나 진실함이 없는 거짓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에게 누림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만을 이루기 위하여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에게 누림이 없었다는 것은 과정보다 결과만을 위하여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에게 누림이 없었다는 것은 관계보다 일만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누림이 없었다는 것은 베풀기보다는 자기 이익만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누림이 없었다는 것은 세상 것을 얻으려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림이 없는 일은 그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근심이나 두려움과 함께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누림이 있는 삶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는 누림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평안히 주무셨습니다.

    그것이 누림이었습니다.

    다윗은 광야의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위험함 속에서도 주님으로부터 기쁨을 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베드로는 옥에서도 평안을 누렸습니다.

    상황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누림이었습니다.

    누림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결과에 집착하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목에 신경 쓰면 하나님의 기쁨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 훈련이었습니다.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함께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훈련이 쌓이면서 누림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하나님이 말하는 성공이 달랐습니다.

    세상은 결과로 성공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림으로 성공을 말하십니다.

    풍랑 속에서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던 주님의 누림이 성공이었습니다.

    광야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다윗의 누림이 성공이었습니다.

    옥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던 바울과 실라의 누림이 성공이었습니다.

    누림이 은혜요 복이라는 이 진리가 오늘도 마음에 새겨집니다.

    누림이 은혜요 복입니다

    누림이 사역이고 열매입니다.

    아름다운 사역은 누림이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과정을 누리는 사역이었습니다.

    관계를 누리는 사역이었습니다.

    주님을 누리는 사역이었습니다.

    버리고 비울 때 누림이 옵니다.

    욕심을 버릴 때 평안이 채워집니다.

    사람의 이목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채워집니다.

    결과를 내려놓을 때 과정의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풍랑 속에서도 옥 속에서도 광야 속에서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 누림이 오늘도 유효합니다.

    오늘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누림을 경험합니다.

    💭 오늘의 질문

    오늘 나는 누리고 있습니까. 결과를 향해 달리면서 과정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하나님은 나의 산업이시며 상급이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하나님은 나의 산업이시며 상급이십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하나님은 나의 산업이시며 상급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을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광스럽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는 한없는 긍휼하심과 친밀하고도 섬세한 사랑으로 관계하십니다.

    지극히 높으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얼마나 깊이 세밀하고 친근하게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 예가 바로 하나님이 초라한 아브라함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며 속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두려워 할 때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이 보잘 것 없는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그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지극히 큰 상급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존재하고 역사하고 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그리하실 의무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신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스스로 채무자가 되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존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실 의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채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상급이 되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그의 존재뿐 아니라 그의 기업과 소득의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너무도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자에게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 되어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원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원합니까.

    하나님 자신을 원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산업이 되어주십니다.

    상급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업이시며 상급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원하는 자를 너무도 사랑하시며 그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에 비교할만한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업이시며 상급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사역이며 상급이며 열매이십니다.

    그 고백이 오늘도 가장 풍성한 삶을 만드는 고백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의 묵상 한 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원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

  • [조용한 고백]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조용한 고백]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 25년 차 IT CEO의 경영 묵상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라는 이 고백을 구원도 성화도 이김도 치료도 동행도 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묵상을 지나 붙들었습니다.

    진리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에게는 철저히 감추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자에게 나타내십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고 또 하나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구원과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이요 본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진리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믿음 생활의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만으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여 무언가를 더하여 열심히 생활합니다.

    그런데 실패하거나 곤고함에 처하게 됩니다.

    결단코 다른 방법은 없으며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그 예가 바로 다윗이 언약궤를 새 수레로 모셔오다 실패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신이 더 좋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했다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만이 답이었습니다.

    구원도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죄에서 용서받음도 죄를 고백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됩니다.

    성화에 이르는 구원이나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도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믿을 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도 믿음으로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악으로부터 이김이나 연약함으로부터 강하게 됨도 믿음으로 됩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강한 자가 되었고 언제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자주 넘어질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치료도 기도의 응답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의 불가능한 모든 것은 다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믿음은 단순합니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무언가를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구원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 믿음이 이김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 믿음이 동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믿음이 단순하다는 것이 쉽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반대로 보일 때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자리에서 믿음을 선택할 때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가장 풍성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성화됩니다.

    믿음으로 이깁니다.

    믿음으로 동행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그 단순한 진리를 붙들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믿음은 또한 선택입니다.

    두려움 대신 믿음을 선택합니다.

    걱정 대신 믿음을 선택합니다.

    포기 대신 믿음을 선택합니다.

    그 믿음이 오늘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불가능한 모든 것이 오직 믿음으로 가능해집니다.

    그 믿음이 오늘도 유효합니다.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게 하소서. 두려움 대신 믿음을 선택하게 하소서. 불가능 앞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성경 말씀 더 깊이 읽기 → 대한성서공회